중앙역 광장은 조용했다. 이따금씩 TV로만 보던 버스커(busker)나 액세서리 노점상이 있진 않을까. 작은 기대감에 광장을 둘러보지만 광장은 비어있었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 푸드덕 비둘기 날갯짓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올 뿐이다. 그나마 빈 광장을 채우는 건 정거장에 들어온 트램(Tram)뿐이다. 위이잉 소릴 내며 들어온 트램에선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없었다. 시간 맞춰 도시를 순회할 뿐. 활짝 열렸던 문은 묵직한 분위기만 안은채 스르륵 문이 닫혔다. 느릿느릿 물결 흐르듯 트램은 떠나갔다. 광장은 또다시 비었다.

점차 날이 밝아오며 18세기 건축물들이 감춰뒀던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 묻혀있던 아름다운 형체가 서서히 드러날수록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 아름답다. 타임머신이라도 탄듯하다. 한국 수도 서울에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들과 현대식 빌라에 익숙해있던 눈은 펼쳐진 광경에 둘 바를 몰라 부르르 떤다. 고풍미 넘치는 건물들 옆에 서서 중절모와 파이프 담배, 그리고 갈고리 지팡이를 들고 있는 나와 부채를 손에 쥔 채 공작부인 드레스를 입었을 아내를 상상해본다. 어떤 표현이 좋을까. 20세기 영화 속 한 장면에 출연한듯하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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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흠뻑 젖은 도로는 도화지가 되었다. 거리를 비추던 조그마한 빛들이 암스테르담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정교함 없이 슥슥 그려낸 그림은 18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그것을 보는듯했다. 빛의 축제. 비가 오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암스테르담의 모습이다. 조심스럽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숨을 쉬게 되면 이 순간이 지나가 버리진 않을까. 추위에 떨려오던 호흡도 잠시 멈추었다. 톡 하고 건드리면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이 내게서 떠나지 않길 바랬다. 찰칵찰칵찰칵. 카메라 셔터가 세 번 닫혔다가 열렸다. 몸 대부분을 차지한 LCD 액정에 담아낸 순간을 보여주며, 카메라는 ‘나 잘했어요?’라고 묻고 있었다. 앞으로의 여행에서 담당할 역할을 기억해내곤 칭찬해주고 싶었다. 잘했어.

날이 밝았다. 구름으로 가득했고 해는 없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은 여전했다. 바람을 막으려 편 우산이 한 번에 부러졌으니 말이다. 아내는 울상이었다. 단아한 남색 우산은 둘이 써도 될 넉넉함. 부드러운 손잡이 마감으로 아내의 맘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산은 한국 대신 자국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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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Dam) 광장에 도착했다. 여행 잡지에서 본 광장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광장 내 관광객은 7명뿐이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진 휴짓조각이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유명 관광지 답지 않게 휑한 모습. 지도를 보지 않았더라면 네덜란드 왕궁도 그저 멋진 건물로 넘길뻔했다.

세계 유명 관광지는 사진과 현실이 다르다고 들었다. 사진 속 아름다운 관광지를 촬영하면 현실에선 사람만 찍힌다나. 그런 점에 선 방해 없이 네덜란드 왕궁을 볼 수 있었기에 행운이었다.

왕궁 탑 뒤로 파란 하늘에 하얀 솜사탕 구름이 지나가는 상상을 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오늘과 비교하니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모습이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무언가 아쉬워 다시 돌아섰다. 그렇게 10초간 가만히 응시한 왕궁은 투박했다. 밝고 환하지 않은 칙칙한 톤. 오래되어 거묵거묵하기까지 하다. 밤새 내린 비를 흡수한 탓일까. 오히려 진득함이 느껴진다. 화려한 조명이나 색상이 배제된 진하고 솔직한 모습이다. 화장이 지워진 맨 얼굴을 본 느낌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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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하나 건널 때쯤이었다.

“이거 그 운하 아니야?”

아내가 암스테르담에 있는 운하가 있음을 기억해내고 말했다.

“맞아,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저쪽?”

나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청승맞게 대꾸했다. ‘웨딩 스튜디오 촬영 대신 암스테르담 운하 스냅 촬영을 한다!’라고 선포 한터다. 이 곳이 암스테르담 운하임을 모른다고 할 순 없었다. 이 순간을 위해 비 내리는 암스테르담을 걸었고, 얇은 코트를 입고 추운 바람에 덜덜 떨었다. 인천공항에서 수화물을 아이슬란드로 보내는 순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춥더라도 버티자고.

운하 옆 작은 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200m 거리에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아내를 촬영하기로 했다. 시선처리에 대한 주문도 잊지 않았다. 두어 걸음씩 걸으며 시선을 천천히 좌상, 좌하에 번갈아가며 두도록 요구했다. 다년간 내 전속 모델을 해온 아내는 익숙한 듯 주문대로 척척해냈다. 심지어는 이번에 주문하지도 않았던 옛 주문 사항도 기억해냈다. 템포는 느릿하게, 표정은 이 곳에 취한 듯이. 그리고 그녀는 암스테르담과 사랑에 빠진 듯,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운하를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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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년 차 선배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거실 중앙에 걸려있던 신혼 사진은 어느새 안방 문 뒤편에 숨겨져 있었다. 이유를 묻자 선배는 말했다.

“이거 짐이야.. 찍지 마.. 남들 하길래 했는데, 얻다 버리지도 못하고.”

인생에 한 번뿐이라는 이유로 돈 백만 원 들여 만든 액자 사진이 짐짝이 돼버렸다. 사진은 멋지고 아름다웠던 2년 전 모습만을 이야기할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선배는 이젠 언제 찍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사진이라고 한다. 그게 싫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사진 말이다.

스튜디오 촬영처럼 연출이 필요치 않았고, 특별 소품도 필요 없었다. 고풍미 느껴지는 건물들이 흔쾌히 배경이 되어주었고, 길을 따라 걷던 행인은 엑스트라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남겨진 사진은 우리 부부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래, 그 날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고, 거리를 걸을 때, 이런 느낌이었지. 나는 이랬는데?’

몇 년 치일까. 사진 한 장 펼쳐놓고 매일 밤 되새김질할 안주거리 말이다. 아내와 함께한 이 순간은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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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국립 미술관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과 궂은 날씨 덕분에 I amsterdam 사인보드 촬영 줄은 길지 않았다. 십여 명이 선 줄, 맨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막상 내 차례가 되자 몇 중국분들이 난입하여 질서가 사라졌다. 매 여행에서 느끼는 부분이지만 가급적 마주치고 싶진 않다. 물론 제주 오설록에서 젊고 젠틀한 중국인을 만난 적도 있지만, 단체 여행객의 경우 확률상 피하는 게 좋다는 경험을 얻었었다.

2미터 남짓한 10글자 사인보드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봐!, 내가 암스테르담이야.’. 붉은색 ‘I am’ 3글자는 도시에 대한 열정과 사랑, 그리고 자부심의 강조처럼 느껴졌다. 난,ㄴ ‘뭐래?’라고 반발할 수도 없었다. 도시가 발산하는 매력에 푹 빠지고 나니 ‘그럴만하네’라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참 사랑스러운 도시다. 시간이 조금 더 허락된다면 더 머물고 싶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8시간 경유 여행은 긴 시간이 아니다. 입출국 수속, 왕복 시간으로 2시간 반을 제외하면 편도 두 시간 거리를 다녀올 수밖에 없다. I amsterdam 싸인 보드가 위치한 국립미술관은 중앙역으로부터 40여분 거리지만, 사람이 앞만 보고 갈 순 없지 않은가. 옆을 보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름다운 새벽 암스테르담과 운하를 만났고, 사진을 찍으며 아내와의 추억도 만들었다. 본 목적지인 아이슬란드로 향하기 위해 아쉽지만 걸음을 돌려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향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