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암스테르담에 가고 싶습니다.

입국 심사관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여권을 제출했다. ‘여기에 온 목적은?’ ‘얼마나 머무는가?’ 여행자에게 늘 묻는 질문을 기대했지만, 심사관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경유 여행 중이며 9시간 이내로 떠날 것입니다.’를 속으로 되뇌던 일은 는 의미가 없어졌다. 심사관은 여권사진과 얼굴을 잠시 대조하곤, ‘Amsterdam Schipol’이라 적힌 커다란 도장을 쾅! 하고 찍으며 말했다. ‘Bye’. 이렇게 빠른 입국심사 처음이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온 곳은 Arrival Hall이었다. 홀 내 원형으로 배치된 벤치엔 이삼십 명이 앉아 다양한 방법으로 주어진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눈을 잠깐 붙이거나, 사진을 보며 여행을 되돌아보거나, 책을  보거나. 늘 사부작 거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라 여기며 공항 안내도를 찾아 돌아다녔다. 나에겐 여유를 즐기기보다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가’가 더 중요했다. 나도 무척이나 ‘목적지향적’인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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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안내도는 네덜란드어로 표기되어있었다. 영어 변환 버튼을 찾을 수 없어, 행인에게 지하철로 가는 길을 물었다. “I want to go to Amsterdam. How can I get a subway?” 그는 지하철 팻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맞나 보다 바로 옆에 팻말이 있었으니.

친절한 팻말을 따라 이동한 지하철 역엔 노란색 발권기들이 우뚝 서 있었다. 두 사람을 앞두고 줄을 섰으나 2분이 채 지나지 않아 차례가 되었다. 네덜란드어 메뉴는 유니언 잭(Union Jack)으로 알려진 영국기를 누르자 영어로 변환되었다. 친숙한 문장이 눈에 띈다. ‘I want to go to Amsterdam’ 이렇게나 직관적인 발권기가 있을까. 버튼을 눌러 2등석 2매를 선택했다. €10.90는 편도임을 감안하면 저렴한 가격이 아니었다. 고작 15분 운행에 만 오천 원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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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I want to go to Amsterdam’ 버튼을 5번은 선택하고 나서야 결제할 수 있었다. 3번째부턴 암스테르담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버튼을 선택했다. 일정 시간 동안 카드를 삽입하지 않아 모든 과정이 초기화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카드 리더기에 카드를 투입할 줄 몰라서 우물쭈물했다. 결국 다른 사람이 결제하는 모습을 곁에 보고 나서야 결제할 수 있었다. 카드를 사각기둥 리더기에 밀착시키고, 기계 방향으로 밀어 넣는 방법이었다. 이걸 몰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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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 든 티켓 두 장을 손에 쥐고 열차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지하철 승강장이었다. 기둥과 벽 빈 공간을 가득 채운 광고판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랄까. 눈에 띄기 위해 자극적인 색상을 고집하는 광고들이 없으니 한결 눈이 편했다. 채도 낮은 톤의 바닥과 천장도 심리적 안정감을 더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이렇게 마음이 편안했던 적이 있던가. 비싼 이용료가 납득되는 순간이다.

터널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승강장에 들어서려는 지하철의 입김이다. 늦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오려다 보니 숨이 찼나 보다. 어린 시절 무더운 여름날이면 지하철 승강장에서 바람을 느끼곤 했다. 눈을 감고 팔을 벌리면, 멀리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한두 걸음 물러나기도 했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바람이다. 안타까운 사고들을 막고자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뒤엔 느끼기 어려워졌다. 아니, 어쩌면 느끼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에 무덤덤해지는 것, 그리고 즐기지 않는 것. 그게 어른이 되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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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이 건넨 제안, 아이가 되어라.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하니 비가 내렸다. 가늠해보려 허공에 뻗은 손아귀엔 금세 빗물이 고였다. 우산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비가 올 줄은 몰랐다. 재빠르게 국립미술관을 방문했다가, 잔세 스칸스(Zaanse Schans)에 방문하려던 계획이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닐까. 도로엔 내리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는 행인도 있었다. 급한 마음에 따라나설까도 싶었지만, 다시 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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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은 석조 건물이었다. 뒤편 바다에서 바람이라도 불 때면 역 전체가 냉기로 가득했다. 바람을 막아줄 문은 없었기에 최대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자리했다. 앉고 보니 우리 외에도 삼사십여 명이 바닥과 계단 등지에 모여 앉아 있었다. 신혼 첫날부터 노숙자라도 된 기분이다. 만약의 사태를 위해 제복 입은 경찰관이 곁에 섰지만, ‘부랑자와 경찰관’이라도 된듯해 즐겁지만은 않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우리를 보면 동양인 노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불편했다.

스타벅스가 문을 열자마자 뛰어 들어갔다. 역 뒤편 바다를 볼 수 있도록 통유리 창으로 만든 아늑한 카페였다. 막 마른행주로 커피머신을 닦던 직원이 돌아서서 주문을 받았다.

“One Americano, and a piece of redvelvet cake”
“Anything Else?”
“That’s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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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준비해준 커피와 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들곤 창가 자리로 향했다. 커피 한 모금과 작게 뗀 케이크를 먹으니, 추위에 떨던 몸이 풀린다. 지친 아내와 나는 말없이 창가를 바라봤다. 어두운 밤하늘, 밝게 빛나는 가로등 사이로 내리는 하얀 빗줄기들이 보인다. 답답한 맘에 ‘내 맘 아니?’ 속으로 창 밖을 향해 외쳐보았다.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갑자기 빗줄기가 더 세졌다. 필시 한 템포 쉬었다 가라는 암스테르담의 대답 이리라.

네덜란드에서의 9시간 중 이미 3시간이 흘렀다. 잔세 스칸스(Zaanse Schanse)로 향하려던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을 이루지 못해 답답하던 맘은 어느새 분노로 변한 지 오래다.

“이 순간을 즐기자, 거기 못 가더라도 괜찮잖아?”

아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눈치챘다고 한다. 아내 말이 맞았다. 이 상황을 즐길 필요도 있었다. 나에겐 너무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으로 시작된 수많은 가정의 뿌리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굵은 줄기마저 잘라내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따스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창가에 앉아 여유를 가져본지도 오래다. 때론 쫓기듯 또 때론 쫓아가듯 대한민국 직장인의 삶에 여유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하루의 대부분을 남을 위해 살아야 하며, 남은 시간은 다시 남을 위해 살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어느덧 나의 삶에 즐길 수 있는 ‘나를 위한 시간’은 남아있지 않다. ‘여유’란 기억 저편에 숨겨져 있던 그리운 이름일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갓난아이 땐 부모님과 삼촌들, 그리고 고모가 나를 보며 우스꽝스러운 표정 짓던 순간을 즐겼다. 조금 더 컸을 땐 가을 하늘을 나는 잠자리들을 보는 순간을 즐겼다. 파란 하늘에 자유롭게 나는 빨간 고추잠자리들로 가득 찰 때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변하기 시작한 순간은 잠자리를 손에 쥐려 오른손에 채를 잡기 시작했을 때였다. 하지만 손에 쥐어도 아름다우리라 생각한 잠자리들은 채집통에서 얼마지 않아 모두 죽어버렸다. 그래, 그때 잠자리 채를 손에서 놨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어느새 포르테(Forte)로 현란하게 내리던 비는 느릿한 안단테(Andante)로 바뀌었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오케스트라의 비 교향곡 마지막 부분이다. 생각이 많던 청중은 이제 슬슬 자리를 뜨려 한다.

음악에 취해 분노하기도 했고, 기뻐하기도 했고, 느릿한 여유감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리고 여유 속에서 즐기는 법을 기억해 내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음악이었다. 이 정도면 멀리서 날아온 보람이 있다.

흡족한 맘으로 커피숍 문을 나서자, 암스테르담이 나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Be the Child. 사소한 것도 즐길 줄 아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다. Yes. 그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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